남주고등학교 총동창회

南洲 강성익 옹과 남주 학원



중등교육의 불모지(不毛地), 산남(山南)의 서귀포에 1955년 4월 남주고등학원을 설립, 그 이듬해 2월 재단법인 남주학원을 정식인가 받아 그해 7월 남주고등학교를 개교한 남주 강성익(康性益)의 업적은 제주도 교육사에 길이 남을 육영의 금자탑이라해도 지나침이 없다.

「돈을 번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그러나 그 돈을 가치있게 쓴다는 것은 더욱 어려운 일이다.」 돈의 철학을 이렇게 털어놓으며 인간의 참(眞實)을 항상 주위 사람들에게 설파하던 강성익의 독지(篤志)는 지역사회의 무수한 일꾼을 길러내는 원동력이 됐을 뿐더러 <인생은 짧되 교육은 길다>는 불멸의 진리를 깨우쳤으니 그 선각적인 발바취가 얼마나 큰가.

현대사를 통하여 적어도 산남지방에 관한한 경제 및 교육의 영역에서 강성익 처럼 많은 영향을 미친 사람은 흔치않다. 돈을 벌줄 알았던 강성익은 그 돈을 멋지게 쓸줄 아는 사람이었다.

그 무렵 서귀포 일대에는 제주시의 높은 교육열과는 달리 중등교육이 크게 뒤져 새로운 인문 고등학교의 출현을 목마르게 기다리고 있었다. 서귀농고가 있기는 했으나 이것은 실업학교의 범주를 벗어나지 못하였고 특히 사립에 의해 고등학교가 설립되리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드물었다.

스스로 배우지 못한 것을 한탄하며 실업계(實業界)에 뛰어들어 확고한 토대를 구축하고 일제의 암흑시대를 누비어온 실업인 강성익은 육영에의 꿈을 항상 키워왔으나 그 기회를 좀처럼 잡지 못하고 있었다. 언젠가 만주에 출장갔을 때 어느 사립학교에 둘러 교정에 세워진 설립자의 동상을 보고 깊은 감명을 받았던 그는 인문계 고등학교가 없어 제주시나 육지로 자제들을 보내야 하는 학부모의 딱한 정상을 눈여겨 살펴왔던 것이다.

마침내 결심을 굳힌 강성익은 우선 재정을 확보해야 한다는 생각아래 고향 법환리에 있는 3천평의 문전옥답을 처분하고 그밖에 토지와 현금 등을 동원, 1억5천만원의 재원을 만들어냈다. 당시로서는 엄청난 돈이었다. 아무런 주위의 도움도 없이 혼자의 힘으로 이 일을 해낸 강성익은 1954년 손가방 하나를 옆구리에 끼고 문교부(文敎部) 등을 찾아다니며 구서서류를 갖추는 등 그 준비를 서둘렀다. 그러나 웬일인지 지방 인사의 반응은 의외로 냉담했다. 가족관계에 있는 오남일(吳南一) 김계용(金繼鏞) 등이 자문에 응했을 정도였다. 혹시나 하는 생각에서 국회의원 강경옥(康慶玉)을 찾아 협조를 당부해 보았으나 뜻밖에도 그의 반응은 살얼음판이나 다름 없었다. 아니 협조는 커녕 노골적인 방해공작이 나오기 시작했다. 지방유지들의 냉담한 반응이 어디에 연유하는가를 알 것 같았다. 나중에 안 일이지난 강성익이 학교를 설립, 명성을 얻게 되면 정치적 기반에 금이 갈지 모른다는 선입관 때문에 그 활동을 견제했던 것이다. 이러한 정치적 작용까지 물리쳐야 했던 강성익의 초지일관은 그야말로 고군분투, 그것이었다.

관계 서류를 빠짐없이 갖추어 1954년 가을 문교부에 제출했던 강성익은 그 해 겨울을 고향에서 넘기고 조바심을 달랠길이 없어 이듬해 이른 봄에 설립 인가를 재촉하기 위하여 다시 상경했다.

그러나 바로 문교부에 달려간 강성익은 아연실색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인가신청 서류가 관계과장의 책상서랍속에 그대로 묻혀있은 것이 아닌가. 별다른 사유도 없이 연기해 연기해 오는 것을 안 그는 참았던 분통이 한꺼번에 터지고 말았다.

이놈들, 학교를 세워 교육하겠다는데 이래도 되는 것이냐. 누가 훼방을 놓는지는 모르지만 제주도가 어딘데, 멀리서 온 사람을 이토록 골탕 먹이느냐.」

대갈일성과 함께 과장의 책상이 곤두박질 쳤다. 현장은 일시에 수라장이 되고 말1960년대 구교사 건물았다. 말릴 여유도 없었다. 아무리 관(官)의 기강이 해이되었다 해도 무작정 연기하는 것이 명분이 없는 일이었으므로 무슨 항의를 할 것인가.

며칠동안을 문교부에 들락거리며 곧 선처하겠다는 대답을 얻어낸 강성익은 뛸 듯이 기쁜 마음으로 개교 준비를 서둘기 위해 하향길에 올랐으나 뒷맛은 개운치가 않았다. 정치인의 방해공작이 정부에 까지 미치고 있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는 이러한 장벽을 슬기롭게 극복했다.

마침내 그해 4월 설립인가를 받은 남주고등학원은 서귀리 291의 3번지에 3천2백평의 부지를 마련, 처음 3교실을 신축하고 이듬해 7월 남주고등학교가 인가되자 뒤에 8교실을 2층으로다시 짓는 등 그 시설을 갖추어갔다.

초대 재단이사는 강임룡, 현학건, 현중화, 강방길, 강보성 등이었다. 초대교장에는 김계용(뒤에 제주학장)이 취임했다.

그 후 남주학원은 1966년 2월 학교법인으로 변경되어 그해 12월에는 남주중학교가 병설되는 등 눈부신 발전을 거듭했으나 초창기에는 학생모집에 적지 않은 고충이 뒤따랐다. 정규진학자들이 타지로 빠지면서 신설학교를 외면했기 때문이다. 극빈자의 자제가 아니면 보육원출신의 고학생, 연령초과자들이 대부분이어서 겨우 1학급 50명을 넘길 수 없었다. 지방에서의 육영사업은 이러한 난관이 가로 놓여 있었던 것이다.

남주학원을 설립하고 초창기를 다진 강성익은 1968년 12월에 타계하고 이듬해 3월 그아들 강치남(康致南)이 이사장에 취임하여 새로운 발전의 계기를 만들었다.

이러한 과정을 거쳐 남주학원이 중흥기를 맞은 것은 동홍리에 새교사 1천평을 신축, 이설하면서부터다. 1974년 10월의 일이었다. 계속 학급의 증설을 보아온 남주고등학교는 1975년 12월 야간 2학급이 다시 인가되고 이듬해에는 총 21학급으로 불어나 명실상부한 인문고등학교로 자랐다. 또 현승우가 교장(10대)으로 취임한 1981년 10월에는 야간 1학급이 주간으로 학칙변경 되는 등 발전의 토대를 굳건히 했다.

그동안 남주학원은 총 3천1백9명의 졸업생을 배출, 사회의 일군으로 내보냈다. 졸업생중에는 미국 뉴욕의 한인회장으로 있는 실업인 강익조를 비롯 육군 대령 권봉래 등 유명한 인재도 나왔다. 서울대학교를 비롯한 연, 고대, 사관학교 등 일류대학 진학률도 해마다 높아져 질적향상이 더욱 돋보이고 있다.

어렵게 벌고 멋지게 투자한 강성익의 독지는 남주학원에서 배움을 닦은 후진들의 가슴속에 간직되어 다시 육영의 씨를 뿌릴 것이다.

- 남주고등학교 총동창회 편집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