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주고등학교 총동창회


民選知事 강성익의 경론(經論)



일제가 기승을 부리던 1920년대 이후 1960년대 초반에 이르는 약 40년간에 걸쳐 제주도의 경제를 주름잡는 두 사람의 거부가 있었으니 한 사람은 제주시를 중심으로 한 산북(山北)의 박종실이오, 다른 한 사람은 서귀포 일대를 중심으로 산남에 군림했던 남주 강성익이었다.

각기 다른 환경과 여건 속에서 스스로의 힘으로 부를 축적, 공익에 기여하면서 오늘의 눈부신 경제성장을 가져오는데 <뿌리> 역할을 했던 이들 두 사람의 존재와 경영철학은 시대가 변하고 모든 경제가 산업화로 치닫는 오늘날에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

무엇이던 노력없이 이룰 수 없다는 것은 만고의 진리이지만 특히 강성익에 있어서는 스스로의 노력으로 재운(財運)을 끌어들인 전형적인 경영인이라는 데에 더한 가치가 부여된다. 널리 중앙무대에까지 알려졌던 강성익의 재력은 1968년 12월 그가 78세를 일기로 작고함에 따라 별로 남긴 것이 없었지만 남주학원을 설립하여 육영에 이바지하고 역사리애 유일의 민선지사로서 <대제주건설>을 주창하는 등 제주도 개발에도 선구적인 박자취를 남겨 오래도록 그 빛을 간지해가고 있다. 기업인이며 육영사업가요, 동시에 행정인이기도 해던 강성익의 면모는 그 다양한 경력이 말해주듯 그 활동범위 역시 매우 넓었다. 특히 정계진출을 위해 세 번씩이나 국회원선거에 뛰어들었던 끈질긴 집념은 이 나라 민주주으에 대한 그의 항심발로(恒心發露)로써 <백성이 주인>이라는 정치의식의 자각을 몸소 실천한 본보기로 평가할 만하다.

한편 1961년 1월 초대 민선지사로 당선된 후 도정지표로 내걸었던 그의 <대제주건설>은 제주종합개발의 새로운 계기를 암시하는 총체적인 청사진이었다는 점에서 앞을 꿰뚫어 볼줄 아는 그 안목에 감탄을 금할 수 없다.

정부의 무관심 속에서 경제적 후진성을 면치 못하던 당시의 상황과 여건으로 볼 때 연륙사업(連陸事業) 등을 주요 골자로 하는 그러한 제창은 사실상 그 실현이 아득한 것들이어서 도민의 회의적인 반응을 받기까지 했다.

그러나 1960년대 이후 경제 건설의 새로운 장이 열리고 제주도의 자원과 지정학적 여건이 각광을 받으면서 다방면에 걸친 개발사업이 착수되자 이후 역대지사들이 가장 앞서는 당면과제로 들고 나온 것이 교통의 불편을 해소하기 위한 연육(連陸) 사업 그것이었다. 물론 이러한 일련의 현안은 도민의 가장 큰 숙원이기도 했다. 따지고보면 이 사업은 민선지사 강성익이 주창한 지 19년만인 1979년 4월 고속여객선 한일2호가 완도항로를 개척, 56마일의 거리를 2시간만에 주파함으로써 마침내 실현이 되었지만 그 당시에는 꿈도 꿀 수 없었던 난제 중의 난제였다.

이보다 앞서 1977년 4월에 부산항로에 카페리1호가 취항, 종전보다 5시간을 단축하였으며 濟木間에도 카훼리2호가 취항하여 96마일 항로를 6시간으로 단축시켰다. 언젠가는 달성해야 하고 반드시 이루어 놓아야 할 연륙(連陸)의 꿈이 마침내 실현을 보았던 것이다.

그럼, 강성익의 아러한 선견지명은 어디서 나온 것일까. 그것은 사업가로서 얻은 체험과 경륜이 바탕이 되어 도민의 숙원이 무엇인가를 간파했기 때문이며 모든 경제건설의 성패가 이 연륙(連陸)사업에 달려있다는 ㄱ성르 미리부터 진단했기 때문이다.

<두주먹을 불끈 쥐고 걸으면서 생각하라> 이것은 강성익이 그의 측근이나 후진들에게 항상 입버릇처럼 일러주던 말이었다. 사색하는 실천가 강성익의 면모은 그가 걸어온 여러 행적에서 쉽게 엿보인다. 지역주민의 냉담한 반응 속에 정재(淨財)를 털어 남주학원을 설립할 때만 해도 그는 서류가방을 들고 혼자서 서울로 오르내리며 끝내는 초지(初志)를 관철하였다. 학교인가 과정에서 문교부 관계관이 여러 가지 핑계를 대어 지연시키는 아니꼬운 꼴을 보다못해 책상을 메어친 일은 오랜 세월이 흐른 오늘에도 유명한 일화로 전해진다.

강성익은 개화의 바람이 일기 시작하던 1882년 9월 서귀포시 법환동에서 태어났다. 그의 집안사정과 소년시절이 어떠했는가는 확실치 않으나 남달리 부지런한 康少年의 꿈은 새로운 문명에 눈을 떠 식견을 넓히고 현실에 과감히 부딪쳐 보는 일이었다. 18세 되는 해인 1910년 한일합방으로 나라의 주권이 빼앗기자 은둔의 섬 제주에도 그들의 경찰통치가 시작되고 황금어장과 산림자원을 노리는 일인(日人)의 발길이 증가되어 갔다. 특히 수산업에 있어서는 제주도연안에서 생산되는 양질의 전복을 탐내어 1870년대부터 일본의 점수기어선들이 연근해에 출몰, 노략질을 일삼고 있었다. 한, 일간의 끊임없는 외교분쟁을 유발하면서 제주도어민의 권익문제로써 초점이 모아지던 황금어장은 이제 그들의 지배하에 들어가 제일가는 수탈의 대상으로 전락하고 말았다. 더구나 1920년대부터 어업의 산업혁명이라 할 수 있는 어선의 동력화가 가속화되자 전복소라가 대량으로 잡혀 여기에 이것을 노리는 수산물상인이 늘어났고 그 껍질로 단추를 만드는 공장이 곳곳에 세워지기 시작했다.

강성익이 서귀포 부두가에 일인경쟁자를 물리치고 단추공장을 세운 것은 1918년의 일로 그의 나이 26세 때였다. 기술과 자본이 영세한 도민의 입장에서 생산공장을 설립한다는 것은 확실히 하나의 산업혁명이었다. 풍부한 자원과 노동력은 공장을 키워가는 최대의 자산이 되었다. 해가 거듭됨에 따라 눈덩이처럼 부가 축적되어 갔다. 놀라운 성장이었다. 수산물공장이 궤도에 오르자 이번에는 육상교통사업이 그의 앞에 다가왔다.

제주도의 도로는 원시적인 형태로 사용되어 오다가 1912년 지적측량이 시작되면서 그 이듬해 일주로로 1백81킬로가 地目上 도로로 분할등기됨으로써 현대적 의미의 도로를 형성하게 되었다.그러나 이 도로가 완전 개통되어 자동차가 다니게 되기까지는 약 10년의 시일이 요했다. 이에 힘입어 대중교통수단으로 제주도에 자동차가 등장한 것은 1925년 2월의 일로 박혁(朴赫)이 설립한 제주동부자동차회사가 그 효시다.

일명 동부차부(東部車部)라고도 불려진 이 회사는 6인승 포드 합승으로 제주 -성산포간을 운행하였다. 또 같은 시기에 최윤순(崔允淳)이 제주통운주식회사를 설립하였는데 제주-모슬포간을 운행한 이 회사의 별칭은 서부차부였다.

강성익이 남부자동차회사를 서귀포에 설립한 것은 그 이듬해인 1926년이었다. 이 회사는 서귀포-모슬포간과 서귀포-성산포간을 동시에 운행하여 남제주 전역을 카바함으로써 제주시의 두 회사에 비해 그 범위가 넓었다. 실로 놀라운 저력이요, 변화가 아닐 수 없었다.

초기의 자동차는 그 이용자가 관리나 부유층에 국한되어 서민들에게는 좋은 구경거리에 불과했으나 교통에 미치는 영향은 실로 컸다. 강성익은 사업이 번창함에 따라 여객외에 화물운송까지 전담하는 육상교토의 왕자로 군림했다.

서귀보통학교에 부지를 내놓고 京城帝大생약연구소(토평소재) 실습용으로 땅을 기중한 것은 이 무렵의 일이었다. 기업에서 얻어진 이익의 일부를 사회에 환원하는 기업윤리가 그의 몸에 배어 있었던 것이다.

1942년 4월 서귀포상공회의소 소장에 피선될 당시 그의 재력은 산남 제1의 확고한 위치를 굳히고 있었다. 물론 당시의 경제구조상 강성익의 재산은 거의가 부동산인 토지였다. 그동안 그는 친지와 이웃은 물론 인연이 있는 곳이면 원근을 가리지 않고 경조사 때마다 찾아다니며 군민고 함께 고락을 나누었다. 해방 후 공산분자의 발호로 말미암아 대립과 반목이 심화되고 급기야는 4·3 사건을 겪는 와중에서도 아무 탈없이 위기를 넘길 수 있었던 것은 평소에 베풀었던 그의 인간적인 온정이 널리 인정되었기 때문이었다.

해방되는 해인 1946년 제주자동차를 인수, 사장이 되었던 강성익은 어려운 정국 때문에 갈팡질팡하는 혼란 속에서도 스스로의 본분을 꾸준히 지켜 도민의 발인 육상교통의 주역으로 그 책임을 다했다. 가장 어려운 시기를 슬기롭게 넘긴 이러한 기여도가 인정됐음인지 1950년 5월 강성익은 제5대 남제주군수로 임명되었다. 물론 이것은 처음 누려보는 관직이었으나 그에게는 극복해야 할 많은 시련이 기다리고 있었다. 취임한 지 1개월만에 6.25동란이 터지고 말았다. 4·3 사건으로 인한 여러 가지 피해 때문에 극도의 식량난에 허덕이던 시절이라 이들 피난민의 쇄도는 설상가상의 고통이 아닐 수 없었다.

그럼으로 구호대책에 군정이 모아진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도청을 오르내리며 구호곡의 증배를 호소하고 때로는 사재를 털어가면서 난민구호에 심혈을 바쳤다. 무려 3년에 걸친 강행군이었다.

그의 남제주군수재임은 휴전협정후인 1953년 9월로 끝났지만 전쟁 중 후방의 소임을 다하면서 별탈없이 난국극복에 기여할 수 있어던 것은 그의 탁월한 행정수완과 평소 인심을 얻어놓은데 있었다. 이후에도 그는 기회있을 때마다 어려운 처지에 놓인 군민들에게 양곡을 나누어 주기도 하고 가난으로 진학이 막힌 학생들에게는 돈을 대주어 공부할 수 있도록 그 뒷바라지르 아끼지 않았다.

이러한 일화가 전해진다. 어느 해인가. 가파도에 흉년이 들어 주민들이 겨울을 넘기기 어렵게 되었다. 이 소식을 들은 강성익은 보리 1백여 가마를 사들여 이를 현지로 보내 나눠먹도록 한 일이 있었다. 그이 독지에 힘입었던 가파도 사람들은 1960년 12월 29일 처음오 도지사선거가 실시되자 이전의 고마운 은혜를 잊을 수 없어 전체 투표중 90% 이상의지지표를 몽땅 강성익 후보에게 던져 보답했다 한다.

그때의 도지사 선거는 차점자인 민주당공천자 김선옥(金善玉)을 불과 1천1백여표로 눌러 강성익이 2만3천6백73표로 당선했던 만큼 가파도민의 전폭적인지지는 당락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던 것이다.

그러나 강성익의 정계진출은 운ㅇ 따르지 않았던지 세 번이나 낙선의 고배를 마시지 않을 수 없었다. 그가 맨 처음 국회의원에 입후보한 것은 1954년에 실시된 5.20선거였다. 남제주군수를 물러난 지 8개월만의 일이었다. 6천4백69표로 패배의 쓴잔을 마셨던 그는 다시 1958년 5.2선거에 도전했으나 역시 실패하고 또 1960년 7월에 실시된 7.29선거에서도 그 뜻을 이루지 못했다. 각종 부정이 판을 치는 당시의 정치풍토 속에서 당선이라는 관문은 바늘구멍만큼이나 비좁은 것이었다.

1960년 12월 초유의 민선지사로 당선된 강성익은 앞에서 말한 <대제주건설>을 도정지표로 내걸어 평소 지녀온 지역개발사업에 대한 경륜을 펴기 위해 중앙의 정계요인들과 활발한 접촉을 벌이며 노심초사했으나 그 뜻을 펴기에는 정부의 지원이 너무나 빈약했다. 약체인 민주당정권은 이른 바, 신, 구파의 파쟁 때문에 지방행정에 눈을 돌릴 만한 여유가 없었던 것이다. 1961년 봄 장면총리가 미국으 매카나기대사 등을 대동하고 제주를 방문했을 때 제주개발을 위한 청사진을 제시, 지원약속을 받았던 강성익의 꿈은 5.16군사구데타라는 정국의 변화로 말미암아 무산되지 않을 수 없었다. 따라서 그의 재임은 5개울만에 불과한 단명에 그쳤다.

강성익은 재임시 봉급을 한푼도 받지 않은 것으로 유명하다. 봉급전액이 고스란이 후생시설 등에 지원되었던 것이다.

거침없이 밀어닥치는 역사의 소용돌이는 또다른 질서를 태동시켜가고 있었다.

강성익은 평소에 이런 말을 곧잘 했다. '이사람들, 민주주의가 별 것인가. 위로 골고루, 아래로 족족 권리를 누리며 잘사는 것이 민주주의지.' 또 이런 말도 했다. ' 요즘 젊은이들, 신문을 잘 안 본단 말야. 소주 몇 잔 값이면 세계 정세를 환히 알 수 있을텐데.....' 민주주의에 대한 신념과 신문관을 잘 나타낸 그의 철학이다.

확실히 강성익은 근대화과정에서 태어나 현대를 풍미한 산남에 우뚝섰던 제주도 경제계의 거목이었다. 더구나 어려운 시대에 살면서 피압박 속에서 이루고 이를 아낌없이 사회에 바쳤던 그 정신과 오늘의 남주학운을 있게 한 육영에의 업적은 도민의 가슴 속에 오래도록 기억될 것이다.

- 남주고등학교 총동창회 편집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