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주고등학교 총동창회


내가 만난 남주 선생


1. 남주선생과의 인연


인연은 관계에서부터 이루어지고 관계는 만남에서 시작된다. 남주학원과 나와의 관계, 그것은 곧 남주선생과의 만남이요, 인연이었다. 그러한 의미에서 그럴 수밖에 없다.

교육계에 출발해서 불과 4년, 교육이 무엇인지도 아직 모르고 젊은 혈기에 의지해서 펄펄 뛰는 고등학생들을 가르치던 애숭이 교사에게 남주고등학교 교감으로 자지 않겠느냐고 의사를 타진해 왔다는 사실부터가 그러하다. 가슴이 설레였다. 내가 과연 교감의직무를 수행할 수 있을 것인가? 마음에 부담을 느끼면서도 약간은 귀가 솔깃해지고 있었다. 그러나 하교의 형편이 전체적으로 취약한 상태인 것을 알면서 섣불리 뛰어들 수 만은 없었다. 자신의 능력을 스스로 판단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야기가 시작되어 반년은 족히 끌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친구들의 강력한 권유가 끊이지 않았고 당시 남주고등학교 강보성 교장은 기회있을 때마다 집으로 찾아와 함께 일하기를 각별히 요청해 왔으므로 그래저래 피할 수 없는 처지에 빠지고 있었다.

드디어 3월 1일. 신하기가 다가오면서 결심할 수밖에 없게 되었다. 부임해야 하겠다고 마음을 정한 원인은 강보성교장의불타는 정열, 학교 발전에의 의지에 감복했던 것이다. 그리고 현 남주고등학교 교장인 강기섬선생이 교무주임으로서 능히 교감의 위치에 설만한데도 굳이 마다하고 나와 함께 일하기를 원한 것도 또 하나늬 원인이라 할 수 있다.

1964년 2월 28일. 아침 일찍 서회선 버스를 타고 털털거리는 비포장도로를 따라 서귀포에 도착한 것은 오후 늦게였으리라. 이제는 장가를들어 일가를 이루고 있는 아들 용진이를 강보에 싸들고 다녔던 기억이 선하니 햇수로 벌써 27년 세월이 지났나보다.

저녁에는 숙소에서 혼자 나와 부임할 학교를 돌아보았다. 아직 이른 봄이지만 운동장엔 잔디가 파랗게 돋아나 말이 풀을 뜯고 있었고 학교 울타리으 돌각담은 무너져 산만한 분위기이지만 돌담주위를 따라 듬성듬성 서있는 플라타나스가 운치를 제법 돋구고 있었다.

교실이라고는 겨우 셋, 뒷켠에 교무실인 듯 싶은 열평 남짓한 초라한 건물, 그 서쪽으로 화장실 서너칸, 그게 학교시설의 전부였다.

기위 알고 있기는 했지만 이게 제주도의 초대 갑부인 남주 강성익 선생이 설립한 학교라는 생각에 미치자 가벼운 흥분을 느끼고 있었다. '구두쇠라더니 듣던 그대로이군'하는 분노와 실망이 뒤엉켜 석양에 넋을 잃고 지는 해를 바라봄 망연자실하고 있었다. 그러나 바로 이 어려운 현실은 나에게 극복의 의지를 불태우게 하였다.

'해보자. 힘을 합해 노력하면 무엇인가 이루어지겠지'

그리하여 남주학원과의 새로운 인연은 시작된 것이다. 그것이 바로 남주선생과의 인연의 실마리다. 그성느 결코 우연한 일이 아니었다. 오래전부터 관계 지어진 만남이다. 전생에서 못다한 일을 함께 이루기위한 새로운 만남이다. 그래서 나는 남주학원 속에서 많은 선생님들과 잊을 수 없는 인간관계를 형성했고 많은 제자들과 사제의 관계를 맺었다.

때로 찾아주는 제자들을 만나면 기쁜 마음으로 다시 남주선생을 떠올린다.

2. 남주선생과의 대면


학교에 부임하고 며칠이 지난 뒤 남주선생을 뵙고 인사하는 날은 약간 가슴이 설레이고 있었다.

교장을 따라 나섰다. 높직한 담장, 우거진 숲, 겉으로만도 대가임을 금새 알아차릴 수 있는 분위기였다. 대무에서 층층대를 서쪽을 향해 내려서서 십여미터를 들어가니 오른쪽에 고목이 버티어 서 있다. 그것은 마치 수문장인 듯 방문객을 내려다보고 있지 않은가. 여기서부터 분위기는 벌써 위압적이다. 오른쪽으로 돌아 들어가 왼쪽으로 다시 몸을 틀면 널찍한 정원, 그 한가운데 용설란이 크게 자리잡고, 금잔디와 각종 이름모를 화초들이 어루러져 사철 꽃을 피우는 양 싶었다. 그러나 그것들도 용설란의 위용에 눌려 제대로 기를 펴지 못하고 있지 않았던가. 몇 년 뒤에 전신주같은 꽃대가 치솟아 하늘높이 화려한 꽃을 피워 경향각지에서 구경군이 모여들었던 일은 이제도 눈에 선하다.

강교장은 현관에서 신을 벗고 마루로 ㅇㄹ라서면서 기침으로 인기척을 하고는 사잇문앞에 서서.

"보성입니다. 들어가도 되겠습니까?" 하고 예의 걸걸한 목소리로 톤을 높혀 인사를 한다.

남주선생은 남쪽 창가 가즉히 한복을 입고 반가부좌를 한 자세로 단정히 앉아 신문을 보다 말고 문을 열고 들어서는 나를 천천히 바라본다. 인자한 듯 강렬한 눈매는 사람의 마음을 꿰뚫어 보는 듯하여 움찔해진다. 강교장이 정중히 인사를 하고나자 나역시 따라서 정중한 인사를 하였다.

"조명철입니다. 잘 부탁합니다."

"내가 오히려 부탁을 해야지, 학교 잘 키워주시요. 학생을 잘 가르쳐야 나라가 잘 되요."

"이사장님, 교육을 잘하려면 시설을 갖추어야 하겠습니다만..." 용기를 내서 입을 열었다.

"아니 창고만 지어서 뭘해, 넣을 곡식이 있어야지."하고 남주선생은 싱긋이 웃는 듯한 표정을 지으며 받아 넘긴다.

사실 남주선생은 계산에 가장 밝은 사람으로 정펴이 나 있었다. 그분을 흔히 주먹을 쥐듯 돈만 쥐는 사람으로 평가를 한다. 일단 들어온 돈을 놓지 않은 구두쇠란 말이다. 그러나 그분은 거래가 분명한 분이셨다. 받는 것도 철저하고 주는 것도 철저한 분이라는 평이었다. 그러니 이익이 없는 투자를 할 까닭이 없다.

어느날 세금을 받으러온 세리가 1원을 받지 않고 나가자 그 세리를 불러 들여 혼을 냈다는 이야기는 유명하다.

"이 사람아, 왜 1원을 받지 않고 가나. 십원에 1원이 모자라면 십원 구실을 못해요. 그래가지고서 무슨 돈을 벌겠다고 쯧쯧..."

호되게 욕을 먹은 세리는 죄송합니다는 말을 몇 번이고 한뒤 뒷머리를 쓰려 나간 사람이 한 둘이 아니라는 이야기가 전한다.

쓰지 않으면 버는 것이라는 절약정신 꼭 지출해야 할 입장이라 할지라도 하루 이틀을 넘겨서 지출하는 지연전술, 주먹을 불끈 쥐듯 돈을 놓아 버리지 말라는 구두쇠 철학. 이러한 것들은 그분의 생활철학이요. 경제, 이론으로서 급기야 교통, 운수업의 창시자요(제주버스사장), 수출업의 선구자(해산물 가공수출업)로 자랄 수 있게 하였던 것이리라. 이와 같이 이지방 산업 발전의 선구자였음에도 불구하고 구두쇠 영감이란 별명을 확실하게 굳혀 버린 것은 돈을 빌리러 오는 사람이거나 젊은이들을 만나면 빠짐엇이 주먹을 쥐는 철학을 이야기 했기 때문인 것으로 여겨진다.

어느 해인가, 졸업식에 참가하여 이사장 회고를 하게 되었다. 거기에서도 졸업생들을 상대로 주먹을 쥐는 철학을 펼쳤던 것이다. 나는 그분의 말 속에서 새로운 삶의 길을 생각해보고 있었다.

"여러분, 젊은이들 들어봐, 돈 없으면 거지가 되거나 도둑놈이 되는거야. 돈버는 데는 귀천이 없어. 열심히 벌어야 해. 부자가 되려면 번돈을 쓰지 말고 꼭 쥐고 있어야 해요. 그렇다고 돈만 쥐면 천해져요. 정신을 함께 쥐어야 하지, 우리 속담에 정신을 차리면 호랑이가 물어가도 산다고 그랬지? 캄캄한 밤에 산길을 가봐요 무섭지, 그러나 주먹을 불끈 쥐면 힘이 생겨, 바로 그거야, 1원짜리 동전 한닢도 새나가지 않을 정도로 항시 주먹을 쥐고 살아가봐요. 틀림없이 부자가 되지."

3. 남주선생과의 이별


강산도 변한다는 십년 세월, 미동도 하지 않던 남주가 오랜 잠에서 개어나 인적 조직의 변화와 더불어 여러면에서 발전을 향한 변화의 몸짓을 시작했다. 첫째가 학급의 증설이었다. 비록 야간이긴 하지만 한 학습의 증설은 남주가족들에게 크나큰 기쁨이었고, 근로청소년을 위한다는 명분도 있어서 퍽 고무적이었다. 둘째는 군언자재 2개교실분을 지원받아 교실 공사가 시작된 일이다. 남주선생도 드디어 투자를 결심하였다. 군원자재 2교실, 공사비와 거기에 다시 2개 교실 및 승강구를 포함한 시설공사를 시작한 것이다. 구두쇠로 일컬어지는 남주선생이 대 역사를 시작했다는 사실은 지역 주민들에게 놀라움을 던져주었다. 그러나 그것은 놀라워할 일은 아니었다. 남주선생응로서는 지극히 자연스런 움직임이었다. 앉아서 지원만을 바라는 선생들이 아니라 무엇인가를 스스로 이루어보려는 의지를 정확히 간파하고 투자를 시작한 것이었으리라.

1년에 한 두 번 찾는게 고작이었던 발길ㅇ 한달에도 두세 번씩 잦아졌다. 학교에 대한 채근도 전같지 않았다.

그 무렵 남주에서는 전도사립 중등교장회의 주관을 하게 되었다. 회의실이라고는 하나도 없는 터라, 교무실을 회의실로 사용하기로 하고 준비를 서둘렀다. 회의가 있던 날은 아침 일찍부터 학교에 나와 청소지휘도 하고 책상 배열에도 관심을 보였다. 특히 그날 잊을 수 없었던일은 집에서 손수 화분 한 개를 들고 온 일이다. 한라산엘 가 보면 지천으로 널려 있는 들꽃을 화분에 옮겨 키운 것, 그 들꽃 화분 하나를 의장석 책상 위에 놓으라고 갖고온 것이다.

들꽃을 길들이는 마음, 그것은 바로 남주선생의 마음씨였는지 모른다. 그분은 젊은 이들을 만나면 살아온 이야기를 재구성하여 들려준다. 부지런한 사람, 절약하는 사람, 예의 바른 사람이 되어야 한다느 이야기들....... 들꽃을 길들이듯 거친 젊은이들을 참사람이 되게하고자 하는 노력이었으리라.

'사람은 낳기만 하면 되는게 아니여, 밥 주고 옷 주고 그런다고 사람이 되는 것도 아니지, 가르쳐야 해요. 배우지 못하면 사람이 될 수 없지. 짐승은 낳아 두면 자라지만.......'

그러한 교육의 신념은 서귀국민학교를 설립할 때엔 기성회장이 되어 학교설립에 헌신, 갖고 있는 땅을 쾌히 부지로 제공하기까지 했던 것이다. 그리고 당시 경성제대(현 서울대) 농학부에서 제주도의 약초 및 식물연구를 위한 식물원(토평약초원) 조성시에는 토지를 손수 매입하여 기증함으로써 그 뜻을 높이 기려 자녀들이 경성제대 입학증서를 미리 발급해 주었다는 이야기도 전해지고 있어 교육에 대한 열의는 그분의 원초적 심성이 이니었나 하는 느낌을 주게한다.

각설하고, 강보성 교장이 장인의 뒤를 이어 민주당제주도위원장의 직책을 받아 정치활동으로 동분서주할 무렵, 나는 어린 나이에 교장 서리 발령을 받고 일하고 있었다. 나에겐 정말이지 크나큰 짐이 아닐 수 없었다.

어느 여름날 갑작스레 집으로 내려오라는 전갈이 왔다. 하던 일을 멈추고 황급히 남주선생의 처소를 찾았다. 마루에는 몇사람의 식구들이 모여있고 남주선생은 심각한 표정을 짓고 앉아 있었다. 분위기가 심상치 않았다. 정중히 인사를 하고 앉기가 무섭게 격한 목소리로 선언적인 말씀을 하는 것이 아닌가.

"내가 오늘 조교장을 부른 것은 증인이 되달라는 걸세. 분명히 기억해둬. 이집은 내가 돌아가면 학교장 관사로 쓰든가 아니면 도서관으로 쓰도록 하겠소. 알았는가. 잘 기억해두게. 중인이야!"

남주선생의 얼굴은 상기되어 있었다. 가족들는 아무말도 없고........

그 일이 있은 뒤 얼마되지 않아 남주선생은 서울소재 대학병원에 입원하였다는 소식이었다. 떠날 때 뵐 수 없었던게 몹시 마음에 걸렸다. 여름이 가면서 병세가 점점 악화되어 간다는 즐겁지 못한 소식 뿐이었다. 끝내 병을 고치지 못하고 남주선생은 세상을 뜨고 말았다. 민종 며칠전 재산 정리 문제를 거론 하였더니 "법이 있지 않은가 내가 죽으면 법이 알아서 처리해 줄터인데 무슨 걱정인가?"하고 말하더라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남주선생의 뜻을 헤아릴 수 있는 이야기이다. 재산이란 산 사람들의 문제요, 죽을 사람의 문제가 아니라는 태연자약한 도인에 가까운 생각, 범인들의 마음을 뛰어넘은 대인다움이 아니겠는가, 그리고 죽음에 앞서서도 법을 지켜야 한다는 교훈을 남긴 것이 아니랴. 그 말 한마디야 말로 평생을 살아온 자기 철학을 설파한 참인간의 말이었음을 생각해 본다.

남주선생의 영구가 돌아오던 날은 겨울이었지만 봄과 같은 따사로움이 번지는 날씨였다. 고향으로 돌아오는 영령을 포근히 맞이하는 하늘의 뜻인 듯하였다.

서귀포 동쪽 비석거리엔 학생들이 도열했다. 태극기와 교기를 앞세우고 영구차를 선도하여 거리를 행진했다. 거리에 들어서자 많은 시민들이 연도에서 묵념을 하기도 하고 뒤를 따르기도 한다. 학생들의 행렬에 함게 어울린 시민들은 큰 어른의 돌아가심을 진심으로 슬퍼하는 표정들이었다.

장의 준비가 시작되었다. 학원장으로 해야 할 것인가 사회장으로 해야 할 것인가의 문제가 대두되어 설왕 설래가 있었지만 고인이 제주사회에 기여한 공으로 보아 마땅히 사회장이 바람직하다는데 의견의 일치를 보았다. 민선 지사를 역임했다는 것 뿐만 아니라 이 지역의 지도자로서 혹은 산업 발전에 기여한 공으로서 또는 샂를 털어 학교를 설립한 공로 등은 남주선생의 마지막 가는 길에 최소한의 예의라는 의견들이었다. 그러나 장의 위원장을 선출하고, 장의 의원 명단을 작성하여 신문지상에 공공하려할 즈음 문제가 제기된 것이다. 제3공화국에서 야당지도자로서의 역할이 기관의 비위를 상하게 했음인지 신문상 넘겨진 장의 의원들에게 전화를 걸어 수락여부를 확인하기 시작한 것이다. 한심스러운 일이었다. 야당에 이익을 줄 수 있는 사회장 그 자체를 막으려는 의도가 아니었나 하는 의혹을 사기에 족했다. 결국 학원장으로 변경하고 말았던 일은 이제도 정치탄압의 한 사례로 많은 사람들의 마음에 기록되고 있다.

살아서는 정적들에 의해 뜻을 제대로 펴지 못하더니 죽어서도 또한 탄압을 면치 못하였으니 이 얼마나 서슬픈 일이던가.

영결식이 거행되던 날은 찬 바람이 불고 눈발이 휘날렸다. 가느 길을 순탄하게 보내지 못함에 자연도 진노하여 화풀이를 한 것인가. 세상이 어지러우니 날씨마저 변덕을 부렸던 것인가. 그러나 학생들에 의해 만장이 들어지고 상여도 메어지고 유해는 상여소리에 실려 교문을 나섰다. 바람과 눈발이 학교 교정을 휘둘러 나간다.

영원한 이별, 그러나 남주선생의뜻은 영원히 사라지지 않고 학생들의 마음 속에 살아있을 것이라고 여겨졌다.

이러한 요지의 말 속에 그분의 경제관, 인간관을 찾아볼 수가 있었다. 그러길래 그분은 제2공화국에서 감히 민선지사로 당선될 수 었었지 않았던가. 도지사로 당선되자 선거공약으로 제시한 '대제주건설', 한라산 동,서 횡단도로의 개설포장, 제2우회도로의 건설, 제주 완도간의 연육교 건설, 계획 등 보통사람으로서는 감히 상상도 할 수 없는 계획들을 실현시키려고 장면 총리를 찾아가 국고지원을 서슴없이 요청했던 당당한 모습도 전해지고 있다. 대제주건설은 남주선생의 꿈이요, 이상이었음이 분명하다.

이야기들 마칙 뜰로 나섰다. 해가 서쪽으로 기울어 삼매봉 산마루에 걸렸다. 서귀포 특유의 봄 속의 냉기가 흐르는 뜨락에 용설란은 잎마다 가시를 꽂고 하늘을 향해 뻗다말고는 땅을 가리키고 섰다. 남방식물이면서도 추운 겨울을 잘도 견디어 싱싱하게 살아 있음으로 보면서 남주선생의 모습이 거기에 있음을 느끼게 하였다.

<제6대 교장 조명철 선생이 남주 선생을 회고하는 글 중에서>